백제세계유산
공산성
백제가 웅진에 수도를 두었던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약 63년간 왕성은 웅진성이라 불리었는데 지금의 공산성이다.
성은 공주시 금성동·산성동에 걸쳐 있는 약 20만㎡ 규모의 거대한 산성이다.
공산으로 불리는 산은 남쪽으로 공주시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금강의 물줄기와 접한다. 동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지
외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전체가 병풍이 돌려진 천연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공산성은 산봉우리를 연결하고
계곡을 가로질러 성벽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강화한 전형적인 방어용 산성이다. 이 안에 왕궁을 비롯한 중요 시설들을
배치하였다. 공산성은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 축조양상, 왕궁지 및 왕궁 부속시설지 등이
발견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이하에서는 공산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구들에 대하여 백제시대 유구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공산성 내부에서 성안마을로 불리는 지역은 북쪽의 금강 변에 위치한 계곡 사이의 분지상태로 남겨진 약 40,000㎡ 규모의
공간으로 산성 내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공간이다. 성안마을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8년에 시작되었고, 2011년과
2012년에는 백제시대의 문화층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진행된 백제시대의 유구 조사는 약 6,300㎡
정도이다. 백제시대의 문화층은 현재의 지표면 보다 깊게는 7m, 얕게는 4m 정도의 깊이에서 확인되며 그 위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이 층층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 백제시대 건물지 15채, 축대, 계단지와 도로, 저수시설과
배수로 등의 유구가 노출되었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공간을 구획한 후 축대를 이용하여 대지를 조성하고 각각의 대지에
건물을 축조한 모습이다. 건물지는 2채의 기단 건물지를 비롯하여 대벽건물지와 굴립주건물지 등인데 왕궁지의 부속시설물인
것으로 판단된다.
성안마을에서 노출된 백제시대 유구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저수시설이다. 절반정도만 조사되었는데
내부에서 옻칠된 가죽 갑옷과 철제의 찰갑, 마갑(馬甲), 대도(大刀) 등이 출토되었다. 옻칠된 가죽 갑옷은 매우 고급스럽고
화려한데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옻칠된 갑옷 위에 붉은 색의 글씨가 세로 방향으로
쓰여져 있다. 그 중 ‘정관 19년 4월 21일’ 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해는 645년 이다. 이 갑옷은 백제에서
생산되는 황칠수에서 채취한 칠을 한 갑옷으로서 고대 한국과 중국의 역사책에 의하면 백제는 당나라에 명광개를 만들어
수출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갑옷이 명광개의 실물일 가능성이 높다. 양국이 큰 전쟁을 치르기 전에 서로 교류하였던 명백한
실물자료가 지하에서 출토된 것이다. 마갑은 백제지역에서 처음 출토된 것으로 말에게 갑옷을 입히고 그 위에 중무장한 기병이
당시 전쟁에서 활약하던 모습을 보여준다.
왕궁지의 북쪽 사면을 비롯하여 서문 부근 등의 평탄한 대지에서는 다수의 건물지와 저장시설, 연못 등이 발견되었다.
송산리고분군
송산리고분군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웅진시대의 백제왕실의 능묘군이며, 백제 왕릉 혹은 무령왕릉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의 남안에 솟아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작은 구릉의 동남향 능선 8부 정도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표고 75m 내외 지점이다.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27년, 1932년에 이루어졌으며, 1971년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무령왕릉이 뜻하지 않게 발견되어,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출토된 유물들은 무령왕대 백제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본산 금송을 목관의 재료로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진묘수 및 도자기 등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줄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교류는 동북아시아를 뛰어 넘어 동남아시아, 멀리는 인도지역과도 교류하였음을 짐작케 하는 유물도 관찰된다. 즉 왕릉 출토 유리구슬에 사용된 납의 산지가 태국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며, 왕비 관식의 삽화(揷花) 문양은 인도 산치탑의 난간(欄干)에 묘사된 문양과 동일 계열이다.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에 대해서는 1980년부터 본격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었다.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계획적인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의 왕성구조에 대한 해명이 대부분 이루어졌다.
이 일대를 왕성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첫째, 왕궁의 시설물로 볼 수 있는 면적 650㎡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과 남북방향으로 일직선 위에 위치한 부소산 중턱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므로 이 일대가 왕의 생활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가장 위계가 높은
관청에 사용된 ‘수부(首府)명’ 기와, 대형 석조, 당나라 장군 유인원의 행적을 기념한 비가 모두 이 일대에서 발견된 점도
이곳이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셋째,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는 이곳에 지방을 통치하는 중요 관청을
건립한다. 이때 백제시대 건물의 하부구조가 새로운 관청 건축에 재활용되었다. 이 점도 이곳이 백제의 왕성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왕궁의 배후 산성인 부소산성의 남쪽으로는 대규모 건물이 들어서기에 평탄한 지형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사비에서 이곳이 왕궁이 입지하기에 가장 좋은 지형이다.
물을 담을 수 있는 4m 크기의 대형 목곽수조 2곳이 발견되었다. 수조에서 불순물을 여과한 후 40m 정도 길이로 연결된 수도관을 통해 필요한 만큼 물이 흘러가게 된다. 목곽 수조의 기능은 물을 모으는 기능과 여과하는 기능 두 가지이다. 수도관은 수키와 2매를 원통형으로 맞대어 연결시켰다.
저장시설은 목곽고 5기, 석실고 3기,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저장시설 내부에서는 다양한 식물유체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종류는 참외, 다래, 복숭아, 살구, 수세미, 오이 등인데 엄청나게 많은 양의 참외씨앗이 발견되었다. 저장시설은 대부분 식물성 음식물을 보관하고 저장하는 기능을 하였다. 1호 목곽고의 경우 약 8㎡ 규모의 장방형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각목과 판목으로 목곽을 짜 맞춘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연못이 발견되었다. 그 규모는 동서 10.6m, 남북 6.2m이며 평면은 장방형이다. 1~1.2m 정도 깊이로 땅을 파내고 가공된 석재를 5~6단 쌓아서 만들었다. 연못의 북쪽으로는 기와를 이용하여 만든 수로가 발견되었다. 이 수로는 연못에 물을 넣는 입수시설로 추정된다. 연못 내부에서는 연꽃잎과 줄기가 발견되어 연지(蓮池)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백제시대의 기와, 토기, 목간, 짚신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관북리유적에는 백제시대의 건물지, 도로, 석축, 공방시설 등의 유구가 존재한다.
부소산의 서남부 언덕에 위치하며, 기록에는 그 내용이 남아 있지 않은 백제시대 사찰이다. 1980년에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약 3,500㎡에 달하는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가람배치는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이며, 특이하게 강당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비시대 대부분의 절터는 평지나 나지막한 약한 경사지에 자리잡는데, 이 절터는 산의 능선을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특이하다. 이러한 지형 조건으로 인해 서남쪽으로는 금강이, 동남쪽으로는 부여 시가지가 잘 조망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제 허리띠, 연화문 와당, 인장와, 금동풍탁, 소조불상, 치미 등이 있다. 금동제 허리띠는 일본
나라현에 있는 정창원 소장품과 유사하다. 매우 잘 가공된 석재들로 기단을 구축한 점, 최고 신분의 인물이 사용한 금동제
허리띠 등을 볼 때, 왕을 위한 사찰인 것 같다.
정림사지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다.
정림사지 인근 지역의 표고는 서측과 남측 대부분의 평탄지는 0~14m의 표고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정림사지 인근 지역의 경우 표고 약 30m 이하의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정림사지를 중심으로 북측 부소산과 동측 금성산의 경우 표고 약 120m 내외의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였다. 정림사지에 우뚝 서있는 석탑 표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기단을 낮게 사용하고 1층 탑신을 높게 설정하면서도 2층부터는 탑신의 높이와 너비를 급격히 줄여 시각을 1층 탑신에 머물게 하는 건축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1층 탑신은 모서리안쪽으로 쏠린 기둥을 세우고 그 내부에 각면 2매씩의 판석(板石)으로 짜 맞추어 마치 두 쪽 문을 달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얇은 지붕돌은 각 층마다 약간의 경사를 주면서 옆으로 길게 뻗어나가다가 지붕의 1/10 지점에서 끝이 살짝 올려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기단부터 5층 지붕돌까지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으나 상륜부는 노반석의 일부만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유실되었다. 조사 결과 상륜부를 고정시켰던 찰주 구멍이 5층 지붕돌까지 뚫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능산리고분군
능산리고분군은 충남 부여군 능산리 부여나성 바로 밖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백제 왕릉으로 전하는 이 고분군은 동서로 이어지는 해발 121m의 능산리산의 남사면 산록에 위치한다. 좌우로는 야트막한 구릉들이 감싸고 있으며, 고분군 앞으로는 왕포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고분군은 3기씩 앞뒤 2열을 이루고, 여기서 북쪽 후방으로 50m의 거리를 두고 1기가 자리하고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부여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의 동쪽 부분 바로 밖에 위치한다.
능산리고분군의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금동제 장신구 및 허리띠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고분군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567년 제작된 석제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 능산리고분군이 사비시대의 백제왕실 무덤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주었다.
나성
나성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외곽성으로서 현재의 부여읍을 감싸며 원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도시의 북쪽과 동쪽을 보호하고 있다.
나성은 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고분군은 3기씩 앞뒤 2열을 이루고, 여기서 북쪽 후방으로 50m의 거리를 두고 1기가 자리하고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부여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의 동쪽 부분 바로 밖에 위치한다.
나성은 산성과는 다른 유형으로 산지와 평지를 연결하여 수도의 외곽을 둘러싸는 새로운 형태의 성곽으로 지형에 따라 특이한
축성방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구릉구간과 저습한 평지를 통과하는 구간에 사용된 축성법이 달랐음이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먼저 구릉을 통과하는 구간은 성벽 안쪽으로는 흙을 다져 성토한 후, 성벽의 바깥쪽은 산을 깎아
급경사면을 만든 후, 2m 정도 높이로 돌을 쌓아 올려 방어력을 높였다.
하지만 저습지를 통과하는 구간은
지엽부설의 공법과 나무말뚝을 박아 연약한 지반을 보강하는 공법 등 특수한 축조공법이 적용된다. 먼저 정리된 기반토 위에
직경 5~6㎝되는 나무와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성곽 기저부 외곽선에 맞추어 나란히 깔아 기반토층과 그 위에 성토될 토축층
사이를 차단함으로써 연약한 기반층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나뭇가지를 깐 면 위에는 점질토를 두께 50㎝ 가량 성토한 후 다시
나뭇가지를 까는 공정을 반복하였다. 현재 세 번에 걸쳐 배열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지엽부설층과 성토층을 반복하여 쌓아 올린
그 높이가 2m 가량 잔존하여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벽 안팎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말뚝 박아
고정시킨 흔적이 확인되었다. 말뚝의 크기는 5~10㎝ 가량이며, 각 말뚝사이의 간격은 50~100㎝로 말뚝의 뿌리가
기반토층위에 최초의 나뭇가지를 깔아놓은 층 위에 이르고 있어 수분으로 인하여 성토층이 그 아래층과 잘 결합 될 수 있도록
하고 성벽 외부면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하여 축성한 신공법을 적용한 사례이다.
저지대 통과부분의
축조공법으로 다른 것 중 또 하나는 기초부 면 외부에 석열 또는 적석층 등의 보강시설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왕궁리유적
왕궁리 유적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왕실이 수도 사비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든 별궁 유적이다.
용화산에서 시작하는 능선의 말단부에 형성된 낮은 구릉 위에 만들어졌다.
궁궐(宮闕)을 보호하기 위한 담장이다. 궁장의 규모는 동벽 492.8m, 서벽 490.3m, 남벽 234.1m, 북벽
241.4m인 장방형이다. 궁장의 폭은 3~3.6m이다. 부속시설로는 수구(水口), 석축배수로, 암거, 문지 4개소가
확인되었다. 동벽의 남측 부분을 통해서 확인된 궁장의 구조는 2단의 석축이 높이 1m 정도 남아 있었는데 그 위에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왕궁의 내부 공간을 보면 남측에는 의례, 정치와 관련된 건물지가 있고 북측에는 휴게 공간인 정원(후원),
수공업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왕궁은 전체적으로 2:1 또는 1:1의 비례를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궁장의 남북(492.8m, 490.3m)과 동서(234.1m, 241.4m) 길이는 2:1이다. 왕궁 내부
공간은 남측 공간과 북측 공간을 1:1로 분할하여 활용하였다. 이처럼 왕궁의 남측에 중요 생활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두는 구조는 중국과 일본의 고대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은 고대 동아시아인들이 왕궁건설의 원리와
기술을 활발히 교류하고 공유하였음을 보여준다.
건물이 들어설 평탄면을 확보하기 위한 시설로서, 궁성 내부의 공간을 일정한 비율로 구획하였다. 동서 석축 4개소, 남북
석축 2개소가 확인되었다. 석축은 잘 다듬어진 석재를 정연하게 쌓고 점토와 잡석을 사용하여 뒷채움을 하였다. 현재
2m(6~7단) 정도가 남아 있다. 남측 공간은 4단의 석축을 쌓아 4개의 공간으로 구획하였다. 각각의 규모는 그 폭이
남쪽에서부터 76.6m, 44.5m, 72.3m, 45.7m로서 대략 2:1:2: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석축의
높이는 제1 동서석축이 2m 정도이며, 나머지는 0.5m에서 1m 정도이다. 제1 동서석축은 다른 석축에 비해 높게
만들어졌다. 왕궁리유적은 규모나 공간의 활용 과정에서 2:1 또는 1:1이라는 비례개념을 염두에 두고 건립되었다. 이는 이
유적이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전 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동서 35m × 남북 18.3m)는 제1 동서석축 바로 앞에서 확인되었다. 이 대형 건물지는 부여 관북리유적에서 확인된 대형 건물지와 유사하며, 왕궁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 건물지는 왕궁의 중심축에 위치하며, 건물을 최대한 제1 동서석축 쪽으로 편재시켜 중문에서부터 건물까지 조회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다. 이 건물은 정전 성격의 중층 건물로 추정된다.
동서석축 3 바로 앞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그 기단 구축방법이 기와를 평적한 와적수법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와적기단은 부여지역의 백제시대 왕궁 유적과 사찰유적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왕궁의 북측 부분에서는 정원과 관련된 시설이 발견되었다. 정원은 물을 가두어두는 연못 형태가 아니라 기암괴석과 장대석,
강자갈을 이용하여 주변의 자연경관을 축소해 만들고 물이 흐르게 한 형태이다. 정원에 물을 끌어오기 위한 저수조, 물을
흘려보내면서 완상하는 중심시설, 수조의 수량 조절을 위한 암거배수시설, 정원에서 나온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 출입시설과
정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원 북쪽의 후원에서는 정원으로 공급하는 물을 집수하기 위한 U자형의 환수구와 곡수로가
발견되었다.
백제의 정원이 일본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왕궁리유적에서 사비시대의 왕궁 정원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양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정원에서 발견된 기암괴석 중에는 태호석, 혹은 어린석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수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백제의 정원이 일본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왕궁리유적에서 사비시대의 왕궁 정원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양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정원에서 발견된 기암괴석 중에는 태호석, 혹은 어린석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수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왕궁리유적에서는 금제품, 은제품, 유리제품 및 그 원료, 도가니, 슬래그, 송풍관 등 다양한 종류의 생산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왕성 내부에 왕실 직속의 수공업 공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방지 남쪽에서는 대형의
화장실 3기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1호 대형화장실의 규모는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이다.
이 대형화장실 유구는 왕성 내에 거주하였던 관리나 궁인들이 사용한 것이다. 고대의 대형 화장실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며 이웃한 일본의 화장실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왕궁리유적은 처음 축조될 때에는 왕궁이었다. 그런데 7세기에 이 왕궁의 용도는 사찰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사찰로 전용되는 과정에 탑, 금당, 강당 등 중요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한정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활용하였다. 사찰로 용도가 변화한 정확한 시기에 대하여서는 학문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석탑을 비롯한 사찰 관련 시설들에 대하여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즉 백제의 유구가 아닐 가능성이 남아 있으므로 신청유산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의미임)
미륵사지
미륵사(彌勒寺)터는 익산시 금마면 표고 430m의 미륵산 아래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어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역을 자랑한다.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전한다.
뒤쪽 미륵산에서 발원한 물길은 가람의 네 면에 걸쳐 인공 물길로 정리되었고, 가람의 남쪽 정면에 큰 연못을 조성했던 흔적도
나타났다. 또한 강당 북쪽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어서 인공 물길을 건너 뒤편의 후원(後園)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습지였던 곳이어서 각별히 치밀하게 배수 처리를 한 점과 아울러, 각 원의 금당도 특별한 구조로 습기를 예방하였다. 금당
바닥에는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에 1m 정도 높이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에 귀틀목을 걸친 흔적이
있다. 따라서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백제는 1탑 1금당의 사찰구조를 바탕으로
불교의 미륵신앙을 구현하기 위해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사찰구조로 미륵사를 만들었다. 백제인들은 이
미륵사를 통하여 누구나 평등한 삶을 염원했던 미륵하생의 꿈을 이룩하려 하였고, 이로써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려는 간절한
염원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고대 백제인들의 신념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 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최근까지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이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안정성이 우려되어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석탑의 해체조사 및 보수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2002년부터 본격적인 해체조사 및 학술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사리봉영기의 판독 결과 석탑은 639년 사리를 안치하면서 건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미륵사가 백제 무왕 집권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해 준 보기드문 사례이다.